[archive] SEP 2015 German and Korean Art ‘very 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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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서문 _ 미학비평큐레이터 강성원

‘very painting’을 타이틀로 독일작가인 우도 져스크와 세바스티안 루드비히, 한국작가인 이광의 전시가 열린다. 이들 세명은 독일에서 활동하는 페인팅 작가로 모두 동시대 독일회화정신을 대표하는 마르쿠스 루퍼츠(전 뒤셀도르프대학 교수)의 제자들이다. 이들 가운데 우도 져스크는 현재 뒤셀도르프 미술 아카데미의 최연소 교수로 동시대 작가들을 길러내는 독일미술교육현장의 최정예 전문가이다.
’회화의 복권‘이 다시금 운위되고 있는 동시대 세계미술의 흐름 속에서 독일 베를린에서도 <페인팅 포에버>전이 개최됐고 그리고 얼마있다 한국 미술계에서도 ’그림/그림자-오늘의 회화‘라는 제목으로 회화의 복권을 운위하는 전시가 열리면서 우리 미술계에는 의아해하면서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회화의 복권‘ 문제에 대한 약간의 소란스러운 말들이 오간지 오래지 않다. 그리고 지금 독일 전후 세대 회화전통이 해온 강력한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탐구의 계보를 직접 계승한 이들 동시대 독일 회화정신의 대표주자들이 스스로 한국에서의 레지던시를 자처해 이곳에서 ’very painting’을 이야기 하고자 하고 있다. 이들이 ‘very painting’을 주제로 한 이곳에서의 작업들을 선보이면서 한국 미술계에서 회화의 복권 논의는 계속 이어질 것 보인다.
그간 상업화랑 등에서 리히터나 바젤리츠 등 독일 전후 세대들의 세계적 대표 작가들 작품들 일부가 소개됐었다. 소개됐다기 보다 일반인들도 화랑 등이 주로 자체 목적으로 선보인 이들의 작품을 겸사겸사 ‘구경’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우도 져스크와 이광, 세바스티안 루드비히의 전시는 우리 미술계 현장 속에서 자신들의 ‘very painting’ 이슈를 제안하는 자체 기획의 예술실천적 맥락을 그 미적 핵심으로하는 프로그램으로 우리 미술계에 스스로 걸어 들어오고자 한다는 점이 다르다. 독일 미술의 ’very contemporary’ 상황이 단지 그 작품으로서만 먼 이국까지 이송되어 전시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몸과 마음이 움직여 우리 미술생활의 현장에서 이들의 ‘예술의지’가 이 땅의 사람들과 함께 움직일 수 있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very painting’을 말하는 이 세 작가 중 독일작가인 우도 져스크와 세바스티안 루드비히의 작품구성은 기본적으로 ’콜라주‘에 의한다. 우도 져스크 작품에서 ’콜라주‘는 존 하트필드(John Heartfield)에게 콜라주가 필요했던 것과는 다른 미적 차원을 지닌다. 져스크에게 콜라주는 세계의 전혀 다른 이질적 타자성들에 대해 하나의 평면 속으로의 조화로운 공속성(belonging together)을, 미적 연대를 가능하게 하기 위한 방법론이다. 사실 이질적인 것들의 미적 조화는 현실의 세계에선 그 이념의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실현되기 힘들다.
우도 져스크는 이질적인 서로 다른 역사적, 문화적 가치, 나아가 지역의 역사적 정당화와 정당화 관련 서사들과 상징들, 그 각각의 리얼리티의 각자 도생의 이념들을 마치 영화감독이 작품 줄거리 편집상 필요해서 장면을 커트해가듯 이미지를 조율해나간다. 각 장면들의 고유성을 유지하면서도 장면들의 페이드 아웃과 페이드 인을 조율하면서 각각의 역사적 소스들이 서로에게 상생적인 효과가 나도록 하나의 미적 장면으로 연출한다. 작품전체를 구성하는 연금술적인 선의 헤게모니를 통해 각 부분들의 미적 타당성에 방향을 제시하며 서로간에 어울리게 돋보이거나 아니면 먼 공간의 배경 속으로 희생하면서도 서로에게 타당한 미적 근거로 배치함으로써 각 부분들의 미적 이질성과 저항을 ‘생동적 생성’을 향한 자발적 감응(correspondence)으로 통합한다.
우도 져스크의 이러한 작업은 언뜻 매우 비정치적인, 미적인 고귀함의 평정심을 산출하기 위한 ‘예술을 위한 예술’ 작업 같기도 하지만, 독일 전후 세대 독일 미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독일정신의 역사에서 보면 상당히 정치적인 시사점을 지닌다. 독일의 ‘very painting’이 예술의 정치성을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것이다.
어쨌든 우도 져스크의 페인팅은 이런 지점의 차원말고도 내게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로 우리의 페인팅들에 대해 생각이 미치도록 한다. 우리에게 알려지고 실제로 소개된 독일 전후 미술작가들의 작품들은 그 미술사의 이념적 특성에서 먼저 읽혀지고 받아들여져왔다. 하지만 특히 우도 져스크의 작품들을 보면서는, 탈이념성을 추구한다는 작가의 말대로 이런 저런 미술사적 맥락에 대한 선입관 없이 그의 작품을 보게 되면, 그 다음에 보이는 것은 ‘페인팅’이라는 유럽 미술의 오랜 역사적 힘이다.
‘힘’이라고 표현은 했지만, 페인팅으로서의 미술이 지닌 유럽에서의 깊이, 아니면 좁게는 독일에서의 깊이랄만한 것의 심연, 혹은 그 예술과 필력의 내공을 본다는 것이다. 언뜻 내공이라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하기 힘든, 어떤 질적으로 매우 강력한 그야말로 장인 혹은 미적 기술이라고 할만한 것을 전통의 바탕이자 힘으로 하면서 숭고한 매력으로 대상을 표현해내고 혹은 화면을 구성해내고 있다는 점이다.
내가 보아온 한국작가들의 페인팅을 굳이 뭉뚱그려 보자면, 어떻게 보면 ‘전통없는’, ‘그저 회화적’ 나아가 미술적 재능의 학부시절 배운 기술 혹은 잘해야 원래 타고난 미술적 재량이 그 위에 조금 덧보태진, 이차원적 평면이라는 어떤 일시적인 표면을 덧씌운 것으로써 우리 근현대미술을 형성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얼핏든다.
우리 미술작품들에는 어떤 강건한 역사적 전통의 실체감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는 말이다. 한국의 근현대미술에서의 이런 저런 페인팅들이 이런 생각에 이어지면서 한순간 주마등처럼 미술사조나 이념외에는 별다른 전통이나 맥락없는, 맥없는 것으로 떠오른다. (하지만 차후 이런 특성에서 우리 근현대미술의 정체성과 우리 미술의 전통 관련 새로운 문제지점들을 읽어볼 수도 있겠다.)
한국인 작가 이 광의 작품은 독일 전통에서의 ‘very painting’의 아시아적 범신적론이며 여성주의적 자연관의 특색을 띈다. ’여성주의적‘이란 표현은 사실 작가 이 광 스스로는 자신의 작품설명에 사용하지 않은 개념이다. 하지만 다보스의 자연풍경들을 직접 만든 템페라로 그려낸 일견 표현주의적인 이 광의 작품들은 사실 독일 표현주의 작품이나 그 이전의 프랑스 후기인상주의나 초현실주의와는 달리 기존의 남근적 세계상, 존재하는 외관상의 자연이나 사회적 세계가 아닌 탈 중심적 생활의 눈으로 대상을 인지, 수용하면서 얻게 된 이미지로 느껴져서 필자가 붙여본 형용어다.
인간을 둘러싼 모든 생명의 근원에 맞대있는 대상으로 인간과 자연을 바라보며, 사물과 자아의 존재의 연쇄를 차별이 아닌 세계에 편재하는 동일성으로 파악하고, 자신의 여러 생활적 단상이나 관념들을 이러한 사물들에 반사해 물활론적인 이미지로 드러내는 그녀의 비원근법적인 시각상은 존재의 연쇄의 한 부분들인 모든 대상적 실재들을 코뮨의 보편적 존재로 만든다. 하나하나의 작품 속 점들의 지평 곧 존재자는 범신론 속의 모나드들이다.
이러한 시각상은 그녀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소위 여성주의적 문화가 구축하고자 하는 새로운 세계질서의 상에 가깝다. 화면 전면에 균등하게 배치된 각각의 에너지들의 모나드와 그들사이의 물 흐르듯 유기적인, 열렸다가 닫히기도 하고 뭉쳤다가 머뭇거리듯 헤어지기도 하는 페인팅 자욱의 유혹들은 구체적인 섬세한 여성적 자아의 주관성의 파도처럼 유유자적 그러면서도 강렬하게 넘실대듯 자신을 표현한다.
세바스티안 루드비히의 작품은 콜라주의 매우 특이한 동시대적 지평의 또 다른 국면을 담보한다. 그리고 그의 콜라주는 스스로 프로그레시브(progressive)하게 전개되고 있는 동시대성의 정신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은 동시대적 정신의 표상 곧 의미있는 이질성의 새로운 유토피아,그 유토피아를 향한 건축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일종의 메타포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방향에서의 사회미학적 실험들이 압축적인 콜라주로 표현된다. 우리는 하나의 창작원리가 스스로 자율적인 체계가 되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시스템의 진보 방향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일련의 섬세하고도 다단계적이고 다차원적인 구성의 과정과 해체와 실험이 요구되는지를 그의 작품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이 점에 그의 작업의 온 의미가 걸려있다. 자신에게 의미있는 것들의 종합과 해체, 그리고 의미있는 것들의 다양한 유토피아적 의미화 시스템의 다시 또 다양한 차원에서의 재설계, 다시 이 과정을 또 다른 다음 단계로 반복해나가기. 이 과정에는 지난한 정신의 긴장과 집중, 방향성의 자각화와 추진력의 집요함이 동반된다. 이를 통해서만 또다른 사회 실체로서의 새로운 동향과 전망의 세계 구축이 비로소 가능하다.
이러한 의지는 그 자체로 예술이요 실천적이다. 정치적 실천이다. 그의 페인팅은 이 과정을 일상에 다시 매개하는 기념비적 기록작업에 다름아니다. 그의 페인팅은 이 과정을 극사실적으로 재현한다. 그에게 회화는 이 과정의 기념비적 모뉴멘트일뿐이다. 즉 정치적 실천 이후의 미적 그림자일뿐이다. 우리는 예술적 실천은 새로운 사회적 현실의 구축을 위한 정신적 설계요 실험이요 영감적 시도라는 사실을 그의 작업과정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SEP 2015 독한쿤스트 very painting 전시 서문 _ 미학비평큐레이터 강성원 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