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없는 위안부’…베를린 시민이 안아주다

  • 한국작가 8인 전시…매년 위안부 문제 전시·집회 열려
    현지 지자체·공익재단 등이 활동지원…어김없는 일본의 방해

안세홍 작가의 ‘이수단’ (사진=쿤스타페어라인 64′ 제공)

일본과 더불어 2차 세계대전 전범국가인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서 한 해에 몇 차례씩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가 다뤄진다.

전시와 집회 등을 통해 일본군의 전쟁 성범죄에 대한 ‘늙지 않는 기억’을 공유한다.

전쟁과 분쟁지역에서 유린당하는 여성의 인권 보호 문제와 맞물려 시민들에게 다가선다.

독일은 일본과 달리 과거사에 대해 사죄와 청산을 상당히 해온 점이 위안부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는 배경으로 보인다.

베를린에 전 세계에서 예술가들과 시민단체 활동가, 이민자가 몰려들면서 다양한 정치·문화적 특색이 분출하는 탓도 있다.

올해도 어김없다. 동베를린 지역에서 ‘위안 없는 위안부’라는 전시가 이달 말까지 열린다.

전시장에는 한국 작가 8명의 작품이 베를린 시민을 맞이하고 있다.

이지현 작가의 ‘늙지 않는 오래된 상처’ (사진=쿤스타페어라인 64′ 제공)

전시장의 한켠에는 강철 벽돌을 쌓은 작품이 놓여 있다. 차갑고 단단한 강철벽돌은 여성용 고운 스타킹으로 감싸져 있다.

독일 할레에서 활동하는 이지현 작가의 ‘늙지 않는 오래된 상처’다.

이 작가는 전시장에서 “스타킹은 외부의 힘에 쉽게 찢어지지만, 그 안의 강철 벽돌은 찌그러질 뿐이라는 것을 형상화했다”면서 “강철같이 단단한 위안부 할머니들의 용기를 떠올리며 작업했다”고 설명했다.

독일 카셀에서 활동하는 정승규 작가는 위안부들이 일본군과 찍은 사진 한 장으로 1천400개의 이미지를 만들어 ‘조작’이라는 작품을 내놓았다.

정 작가는 “역사 조작과 왜곡이 쉽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일본군 위안부를 부정하는 일본 정부의 행태를 비판한 것이다.

이지현 작가의 ‘늙지 않는 오래된 상처’ (사진=쿤스타페어라인 64′ 제공)

권순철 작가는 ‘얼굴’이라는 작품에서 밀려드는 고통을 살포시 웃어보이며 참아내는 노인의 모습을 담아냈다.

잊혀지지 않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안고서도 가해자와 당당히 마주한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이번 전시를 주최한 ‘쿤스타페어라인 64’의 대표인 이광 작가는 ‘죽음에 대한 연구’라는 테마 속에서 이미 세상을 뜬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떠올리며 회화 작품을 만들어냈다.

한국에서 태어난 뒤 미국으로 입양된 케이트-허스 리(한국명 이미래) 작가는 죽부인 등을 활용해 여성의 성적 도구화를 비판하는 설치작품 ‘보름달’을 선보였다.

전시에서는 ‘겹겹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여러 국가에서 위안부 관련 사진을 찍어온 안세홍 작가의 작품들과 유연복 작가의 판화 작품인 ‘능욕도’, 독일에서 활동 중인 황현덕 작가의 회화 ‘아리랑’ 등도 선보였다.

이지현 작가의 ‘늙지 않는 오래된 상처’ (사진=쿤스타페어라인 64′ 제공)

이 같은 위안부 관련 문화 행사는 대부분 독일 측의 후원으로 가능했다.

독일에선 지방자치단체와 공익재단, 민간단체, 선교단체 등이 위안부 문제를 시민들에게 알리는 활동을 지원해왔다.

‘위안 없는 위안부’는 베를린 시 측의 후원을 받았다. 전시장인 ‘리히텐베르크 Rk 커뮤날레 갤러리’도 베를린 시(市)의 건물이다.

지난달 8일 전시 개막식에는 한국적 행정구역 개념으로 ‘구'(區) 단위인 베를린 리히텐베르크의 마이클 그룬스트 시장이 참석했다.

그는 “2차 세계대전의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조명하는 전시에 참여하게 돼 대단히 감사하다”면서 전쟁과 분쟁 시 여성 인권 침해 문제의 심각성을 지적했다.

독일 정부와 기업이 출연해 만든 ‘기억, 책임 미래 재단’은 2000년대 초반 위안부 할머니들을 독일로 초청해 순회강연 및 전시를 후원했다.

2009년에는 독일 기자단체가 개최한 ‘제3 세계와 2차 대전’이라는 독일 도시 순회전시전에서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전시도 이뤄졌다.

이런 과정에서 길원옥, 이옥선, 김복동 할머니 등이 독일을 찾아 위안부 문제의 진실을 알려왔다.

지난해 8월에도 이옥선 할머니가 베를린을 방문해 독일의 한국 관련 시민단체인 코리아페어반트와 일본계 시민단체 ‘일본여성모임’ 등의 주도로 일제 만행을 고발하기 위해 기획한 시위에 참석했다.

12월에는 독일 앰네스티, 독일여성인권단체 ‘테레 데스 펌므’, 코리아페어반트 등이 주최한 ‘전쟁 분쟁 속 여성 성폭력’이란 주제의 콘퍼런스가 베를린에서 열렸다.
이 콘퍼런스에는 길원옥 할머니가 함께했다.

독일의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위안부 문제를 여성 인권운동의 중요한 사안으로 바라본다.

‘테레 데스 펌므’의 활동가인 지나 톤크는 3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전쟁과 분쟁지역에서 여성에 대한 성범죄는 심각한 상황으로, 집단 성폭력과 강제 매춘이 일상화돼 있다”면서 “위안부 문제는 이러한 현실과 연결돼 있다”고 말했다.

또한, “불행하게도 2차 세계대전 이후 73년간 일본 정부는 그들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잔학한 행위에 대해 용서를 구하지 않았다”면서 “일본 정부에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책임을 요구하면서, 대중의 관심을 높이기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광 작가는 “독일은 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으로서 부채 의식이 있기 때문에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는 전쟁에서 발생한 인권 유린에 대해서도 심각하고 인식한다”고 말했다.

베를린에서 열려온 여성 인권 관련 행사에서도 위안부 문제는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지난 3월 8일 베를린 도심에서 열린 ‘여성의 날’ 행사에서도 한국 관련 단체들의 참여 아래 위안부 문제가 부각됐다.

다만, 독일 사회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해 우호적인 시선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정치권에서는 일본의 압박 탓으로 부담스러워하는 모습도 보인다.

정치권 일각에선 연방하원이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결의안을 채택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지만, 정치권의 전반적인 반응은 미온적이었다.

2016년 프라이부르크 시는 자매결연 도시인 수원시와 합의해 프라이부르크에 ‘평화의 소녀상’을 건립하기로 합의했으나, 일본 측의 압박으로 철회하기도 했다.

코리아페어반트의 한정화 대표는 “아직 독일 정치가 남성 중심적인데다 일본의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적극적이지 못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